후르츠 바스켓 1기는 2쿨 전 25화다. 그런데 이 25화가 다루는 것은 인물을 소개하고 관계를 쌓는 데까지이고, 작품의 중심인 저주 이야기는 2기 이후로 넘어간다. 2쿨을 통째로 도입부에 쓴 것이다. 이런 배분은 아무나 못 한다.

후르츠 바스켓

뒤가 보장돼 있었다

이 리메이크는 처음부터 원작 완결까지를 전제로 만들어졌다. 실제로 2019년 1기, 2020년 2기, 2021년 파이널 시즌으로 이어져 원작 전체가 애니메이션이 됐다. 시작하는 시점에 세 시즌의 분량이 확보돼 있었다는 뜻이다.

분량이 확보돼 있으면 서두를 이유가 없다. 1기에서 원작 진도를 최대한 뽑아 놓아야 하는 압박이 사라진다. 반대로 뒤가 없는 1기는 그 시즌 안에서 무언가를 매듭지어야 하므로 앞부분을 압축한다. 이 작품이 25화를 느리게 쓸 수 있었던 것은 실력이 아니라 조건이다.

2001년판은 그럴 수 없었다

이 작품에는 2001년에 만들어진 앞 판본이 있고, 이번 것은 18년 만의 완전 신작 리메이크다. 그때는 원작이 아직 연재 중이었다. 끝을 모르는 상태에서 만드는 애니메이션은 세 시즌을 미리 계획할 수 없다.

같은 원작을 두 번 만들면서 결과가 갈린 이유가 여기 있다고 본다. 연출력이나 예산 이전에 끝이 어디인지 알고 시작했는가가 다르다.

혼다 토오루

도입부에 25화를 쓴다는 것은 이 인물을 25화 동안 지켜보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우를 전원 바꾼 것도 같은 방향이다

이번 판본은 성우진이 2001년판에서 전원 교체됐다. 일부만 남기는 절충도 흔한데 그러지 않았다. 앞 판본을 이어받기보다 처음부터 다시 짓는다는 선언에 가깝다. 세 시즌을 미리 잡아 둔 계획과 방향이 같다. 앞 판본의 무엇도 전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남은 사실도 적는다. 제작은 TMS 엔터테인먼트, 감독은 이바타 요시히데이고 1기는 2019년 4월부터 9월까지 방영됐다. 원작은 타카야 나츠키가 하쿠센샤의 「하나토유메」에 연재한 만화다.

도입부에 25화를 쓰면 무엇이 달라지나

얻는 것부터 적는다. 인물이 늘어날 때마다 그 인물에게 회차를 하나씩 줄 수 있다. 열두 띠라는 설정은 등장인물이 계속 늘어나는 구조인데, 압축한 편성에서는 새 인물이 소개와 동시에 사건에 투입된다. 여기서는 소개만 하고 다음 화로 넘어가도 된다.

잃는 것은 방향이다. 25화 동안 큰 줄기가 움직이지 않으면 보는 사람이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지 잡을 단서가 적다. 저주라는 중심 소재를 1기가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제목이 약속한 것을 1기가 미뤄 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교환이 옳았는지는 세 시즌을 하나로 놓고 봐야 답이 나온다. 그리고 그렇게 볼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이 리메이크가 얻어 낸 조건이다.

몇 화까지 봤느냐로 갈린다

이 작품을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운 이유가 앞의 이야기에 그대로 들어 있다. 25화까지만 본 사람에게 이 작품은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이야기다. 인물이 늘어나고 사이가 가까워졌을 뿐 저주 이야기는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 세 시즌을 다 본 사람에게는 그 25화가 뒤를 떠받치는 바닥으로 보일 것이다.

1기까지만 놓고 보면 남는 아쉬움은 완성도보다 이 25화만으로는 값이 다 치러지지 않는다는 데 붙는다. 뒤가 보장된 편성의 값은 뒤에 가서 나오고, 앞에 있는 사람은 그 값을 아직 못 받는다.

같은 제작사가 같은 해에 둘을 냈다

제작사 TMS 엔터테인먼트는 이 작품을 2019년 2분기에 내보내고 같은 해 3분기에 「닥터 스톤」 1기를 내보냈다. 둘 다 2쿨이다. 한 해에 2쿨짜리 둘을 연달아 붙이는 편성인데, 그중 하나가 세 시즌 계약을 전제로 한 리메이크였다는 것이 이 회사의 사정으로도 읽힌다. 뒤가 보장된 기획은 만드는 사람에게도 계획을 세울 수 있게 해 준다.


1기에서 멈출 생각이라면 권하지 않는다. 이 25화는 혼자 서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세 시즌을 다 볼 생각이라면 그때는 이 느린 25화가 왜 필요했는지가 뒤에서 설명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