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의 평판은 주인공의 성격에 걸려 있다. 나는 다른 각도에서 적는다. 이 각본은 주연 성우에게 무엇을 요구했는가. 요구 목록을 만들어 보면 이 작품의 설계가 그대로 드러난다.

첫 번째 요구는 화면이 돕지 않는 상태로 정보를 흘리는 것이다
주인공의 능력은 죽으면 특정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그 사실을 남에게 말할 수 없다. 이 제약이 연출에 무엇을 강제하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하나로 좁혀진다. 말할 수 없는 능력은 그릴 수도 없다. 몇 번을 되돌아왔는지, 지금 그가 이미 무엇을 겪은 사람인지는 화면에 표시할 방법이 없다. 표시하는 순간 남들이 모른다는 전제가 깨진다.
그러니 그 정보는 인물의 말과 호흡에만 실린다. 같은 장면을 두 번째로 지나는 인물은 첫 번째와 같은 대사를 다른 속도로 말해야 한다. 시청자만 알아채고 작중 인물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차이여야 한다는 조건까지 붙는다. 각본이 성우에게 낸 첫 번째 과제가 이것이다.
두 번째 요구는 첫 회부터 한 시간을 버티는 것이다
1화는 한 시간 편성이었다. 보통 신작 1화가 24분인데 두 배를 썼고, 그 시간의 상당 부분이 낯선 도시에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는 데 들어간다. 대형 액션으로 관객을 붙드는 1화가 아니라 수다로 붙드는 1화다. 원작이 웹소설 사이트 연재에서 출발해 MF문고J에서 서적화된 나가츠키 탓페이의 라이트노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길이는 원작의 호흡을 줄이지 않겠다는 판단이다.
회차 제목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8화가 「울고 울부짖고 울음을 그쳤으니까」, 17화가 「추태의 끝에」다. 사건의 이름이 아닌 상태의 이름이고, 상태는 대사로만 갱신된다.

이 인물이 무엇을 겪었는지는 화면에 남지 않는다. 목소리에만 남는다
세 번째 요구는 같은 인물을 여러 번 처음부터 다시 쌓는 것이다
되돌아간다는 것은 인물이 쌓아 온 관계가 초기화된다는 뜻이다. 상대는 그를 처음 보는 사람이 되고, 그만 기억을 안고 있다. 연기의 관점에서 이것은 같은 인물을 여러 벌 만들어 두고 번갈아 꺼내 쓰라는 요구다. 전 25화 동안 이 요구가 반복된다.
나츠키 스바루 역의 코바야시 유스케는 이 작품으로 2017년 제11회 성우 어워드 신인남우상을 받았다. 신인상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하다. 경력이 얇은 배우에게 25화짜리 독백에 가까운 배역을 통째로 맡긴 캐스팅이었다. 18화 「제로부터」가 시리즈를 대표하는 회차로 꼽히는 이유도 형식만 놓고 보면 단순하다. 그 회차는 액션이 거의 없고 장소도 거의 바뀌지 않는다. 남는 것은 두 사람의 말뿐이다. 3화 제목이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이고 18화가 「제로부터」다. 같은 말이 두 번 쓰이고, 사이에 열다섯 편이 놓여 있다.
화이트폭스가 화면을 화려하게 만들지 않은 이유
이 제작사는 물량으로 이름난 곳이 아니다. 같은 회사가 만든 「슈타인즈 게이트」도 대부분의 시간을 좁은 실내에서 사람이 말하는 데 쓴다. 감독 와타나베 마사하루와 시리즈 구성 요코타니 마사히로가 고른 방향도 같다. 카메라는 자주 멈춰 있고 컷은 길다. 잘 그린 화면을 만드는 대신 말을 방해하지 않는 화면을 만들었다. 싸움이 화려했다면 위의 요구 셋이 전부 무너졌을 것이다.
요구가 감당되지 않은 곳
결점을 덮지는 않겠다. 25화는 길고, 중반에 같은 구조가 반복되는 구간이 실제로 있다. 에밀리아에게 배정된 정보량이 1기 안에서 부족하다는 지적에도 동의한다. 렘에게 인기가 쏠린 것도 캐릭터의 매력보다 각색이 분배한 분량에서 나온 결과다. 말로 인물을 세우는 작품에서 말을 덜 받은 인물은 덜 세워진다. 요구 목록이 주인공에게만 집중된 대가다.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한다면 그 공을 작품 하나에 통째로 돌리기는 어렵다. 설계가 절반이고 그 설계를 실제로 성립시킨 목소리가 나머지 절반이다. 각본이 낸 과제는 종이 위에서는 무모했고, 부스 안에서 감당되지 않았다면 이 작품은 그냥 말이 많은 이세계물로 끝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