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볼 것은 러닝타임 하나다. 스튜디오 지브리 장편 열아홉 편의 길이를 짧은 것부터 늘어놓았다.

열아홉 편을 길이순으로
- 75분 고양이의 보은 / 82분 아야와 마녀 / 86분 이웃집 토토로
- 88분 반딧불이의 묘 / 94분 마루 밑 아리에티 / 95분 코쿠리코 언덕에서
- 100분 벼랑 위의 포뇨 / 103분 마녀 배달부 키키 / 103분 추억의 마니
- 111분 귀를 기울이면 / 118분 추억은 방울방울
- 119분 하울의 움직이는 성 / 119분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 123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 124분 천공의 성 라퓨타 / 125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126분 바람이 분다 / 133분 모노노케 히메 / 137분 가구야공주 이야기
가운뎃값이 111분, 평균이 108.5분이다. 86분은 아래에서 세 번째이고 가운뎃값보다 스물다섯 분이 짧다. 이 회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 길이로는 가장 짧은 편에 든다.
86분이라는 것이 무엇을 가능하게 했나
이 영화와 「반딧불이의 묘」(88분)는 1988년 4월 16일 같은 날 개봉했고 두 편을 이어 보는 편성이었다. 둘을 합치면 174분이다. 위 목록에서 가장 긴 두 편(133분·137분)을 합치면 270분이 되는데 그건 한 번에 걸 수 없다. 두 편 동시상영이라는 편성은 두 편이 다 짧아야 성립한다. 길이가 먼저 정해졌고 편성이 그다음이었는지, 편성이 길이를 정했는지는 날짜만으로는 모른다. 다만 둘 중 하나가 120분이었으면 그 편성은 없었을 것이다.

여든여섯 분에 들어간 것과 들어가지 않은 것을 갈라 보면 이 영화의 설계가 보인다
짧은 편에 무엇이 없나
같은 감독의 긴 작품들과 견주면 없는 것이 뚜렷하다. 133분짜리 「모노노케 히메」에는 대립하는 집단이 셋 있고, 124분짜리 「천공의 성 라퓨타」에는 추격이 여러 차례 나온다. 86분짜리 이 작품에는 맞서는 상대가 없다. 싸움도 추격도 없고,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악역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 둘이 이사한 집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이 사건의 대부분이다.
그러니 이 86분은 덜 만든 결과가 아니라 맞서는 상대를 두지 않기로 한 선택의 길이다. 갈등이 없으면 해결에 쓸 분량도 필요 없다. 위 목록에서 120분을 넘는 여섯 편을 보면 전부 인물들이 무언가와 맞선다.
가장 짧은 셋을 나란히 놓으면
목록 맨 앞의 셋을 다시 본다. 고양이의 보은 75분, 아야와 마녀 82분, 이 작품 86분이다. 뒤의 둘은 각각 2002년과 2020년 작품이고 이 작품만 1988년이다. 같은 회사에서 가장 짧은 세 편이 십사 년과 십팔 년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짧게 만드는 것이 특정 시기의 방식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다만 세 편의 사정은 서로 다르다. 「고양이의 보은」과 「아야와 마녀」는 둘 다 감독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니고,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한 지브리 장편 중 가장 짧다. 그가 감독한 나머지는 100분(벼랑 위의 포뇨)부터 133분(모노노케 히메)까지 아홉 편이고, 86분 다음이 곧바로 100분이라 이 작품 아래로는 아무것도 없고 위로 열네 분이 비어 있다. 이 86분이 유독 짧다는 것은 그 안에서 봐야 보인다.
명단에서 하나 더
배역 표기에 눈에 걸리는 것이 있다. 토토로와 고양이버스를 다카기 히토시 한 사람이 맡았다. 주제가도 오프닝 「さんぽ(산책)」와 엔딩 「となりのトトロ」를 둘 다 이노우에 아즈미가 부른다. 86분 안에서 목소리와 노래를 맡은 사람을 여럿 두지 않았다. 작화감독은 사토 요시하루, 음악은 히사이시 조, 원작과 각본은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다.
남은 사실도 적어 둔다. 1988년 4월 16일 일본 개봉이고 한국 개봉은 2001년이다. 열세 해가 걸렸다.
권한다. 애니메이션을 한동안 멀리했던 사람에게 무엇을 먼저 틀어 줄지 고민하는 사람. 86분이고 맞서는 상대가 없어서 중간에 설명을 붙일 일이 없다.
안 권한다.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지 분명해야 하는 사람. 이 86분에는 목표를 향해 가는 줄기가 없는데, 빠뜨린 것이 아니고 그렇게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