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름으로 작품을 찾아보는 버릇이 있다. 콘도 요시후미를 찾으면 장편 연출작이 한 편 나오고 거기서 끝난다. 1995년 「귀를 기울이면」이고, 그는 1998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조건을 알고 보면 영화가 다르게 읽힌다.

귀를 기울이면

이 영화가 지브리 안에서 맡은 일

1995년 7월 15일에 개봉해 그해 일본 박스오피스 1위를 했다. 지브리 안에서 이 작품이 맡은 일은 흥행만이 아니었다. 시나리오와 그림 콘티를 미야자키 하야오가 맡고 연출을 콘도 요시후미가 맡았는데, 이 배치는 다음 감독을 세우는 형태다. 각본을 쓴 사람이 감독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화면을 맡기는 구성이기 때문이다. 미야자키가 각본을 전담하고 연출은 하지 않은 경우는 그의 이력에서 흔치 않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두 사람의 손이 겹쳐 있다. 어디까지가 누구의 몫인지 나는 가릴 수 없고, 가릴 수 있다고 말하는 글도 믿지 않는 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이 배치가 성공했다면 지브리에는 감독이 한 명 더 생겼을 것인데,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

츠키시마 시즈쿠

무언가를 만들어 보려는 중학생이 주인공이다. 그 이야기를 후계자로 지목된 감독이 찍었다

주인공이 하는 일이 이 영화가 하는 일과 같다

시즈쿠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잘 쓰는 사람의 이야기는 아니다. 처음 써 보고, 다 쓴 뒤에 자기 솜씨가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구조다. 한 편밖에 없는 감독의 데뷔작이 처음 만들어 보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은 우연이라기에는 겹치는 데가 많다. 원작은 히이라기 아오이가 1989년에 발표한 만화이고, 원작에는 없던 무게가 이 겹침에서 생긴다.

삽입곡도 같은 방향에 있다. 극 중에서 반복되는 「컨트리 로드」는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를 미야자키 하야오가 일본어로 옮긴 것이다. 남이 만든 노래를 자기 말로 바꿔 부르는 장면이 영화 안에 있고, 그 번안을 실제로 각본가가 했다. 남의 노래를 자기 말로 옮기는 일이 영화 안에서도 밖에서도 일어난 셈이다.

바론

시즈쿠가 쓰는 소설 안에서 목소리를 얻는 인형. 만드는 사람과 만들어진 것이 한 화면에서 마주 본다

원작 만화와 무엇이 달라졌나

원작은 히이라기 아오이가 1989년에 낸 만화이고, 영화는 1995년에 나왔다. 사이에 여섯 해가 있고 매체도 바뀌었는데, 각본을 쓴 사람이 원작자가 아니라는 점이 여기서 크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시나리오와 그림 콘티를 함께 맡았다는 것은 대사만 고친 데 그치지 않고 장면의 순서와 길이까지 다시 짰다는 뜻이다. 각본과 콘티를 한 사람이 쥐면 원작에서 무엇을 뺄지가 그림 단계에서 한 번 더 정해진다.

연출을 맡은 사람이 그 콘티를 받아 화면을 만들었다. 이 구조에서 감독의 몫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고, 나는 그 답을 모른다. 다만 콘도 요시후미는 이 작품 전에 지브리에서 작화를 맡아 온 사람이다. 그림을 오래 그려 온 사람에게 완성된 콘티를 넘긴 배치였다는 것까지는 말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남긴 것 하나

극 중에서 시즈쿠가 쓰는 소설에는 고양이 인형 바론이 나온다. 이 인형은 나중에 지브리의 다른 극장판 「고양이의 보은」에서 주인공으로 옮겨 간다. 작중 인물이 상상해 낸 것이 다음 작품의 주인공이 되는 경로인데, 이 영화가 스튜디오 안에서 무엇을 물려주었는지를 보여 주는 유일하게 눈에 보이는 흔적이기도 하다. 감독은 두 번째 작품을 만들지 못했지만 그가 찍은 인형은 다음 작품으로 갔다.

길이도 적어 둔다. 111분이다. 중학생 한 명의 몇 달을 다루는 데 쓰는 시간으로는 넉넉한 편이고, 그 넉넉함이 이 영화의 속도를 정한다. 사건이 적은 대신 같은 장소가 여러 번 나오고, 도서관 대출카드라는 작은 장치 하나가 이야기 전체의 출발점 노릇을 한다.

두 사람의 몫을 나눠 적는다

이 영화의 몫이 두 사람에게 걸쳐 있으므로 하나로 뭉뚱그리면 누가 무엇을 했는지가 사라진다.

  • 각본: 원작 만화에 없던 진로와 재능이라는 문제를 얹어 111분을 만들었다
  • 연출: 그 문제를 중학생의 하루 크기로 유지한 채 끝까지 끌고 갔다

아쉬운 것은 후반의 한 대목이 인물의 나이에 비해 결론을 서두른다는 점이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을지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를 볼 때는 그 빈자리도 같이 보게 된다.